늦가을에..
세월이 너무 빠른것 같아요.
어서 어서 커서 어른이 되었으면,
밤새 시험 공부하랴, 새벽에 일어나 도서실 가랴..
커다랗고 무거운 책 가방들고 학교 계단을 오르내리며
참으로 그 시절이 영원할 것만 같이 지루했던 학창시절도 있었지요.
팔십 칠세에 돌아가신 친정 할머니가 제게 그러셨어요.
너희는 하루가 재밋어 금방 지나가도, 세월은 아직도 많이 남았고 천천히 오는 것 같지?
나 같은 노인네는 하루해가 이리도 긴데,, 세월은 너무도 아쉽게 저도 모르게 훌쩍 지나 가는구나.
요즘, 제 시간이 어느새 할머니가 말씀하신 그 시기가 가까와진 것처럼
어쩌면 이렇게 세월이 금새 금새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있을까요?
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중년이란 이름이 저를 대신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만 잔뜩 앞에 놓여져 있는 모양새이네요.
어제는 오랫만에 은행에 가서 통장을 정리해보니 이번달에 잔고가 두둑하더군요.
그 길던 임금 협상도 끝나서 인상된 월급소급분 몇개월치랑 위로금 등등..
공돈 생긴 것처럼 곗돈 탄 것처럼 맘이 들뜨게 되더군요.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그때 문득, 집안에서 멍하게 천정만 보고 계실 것 같은 연로하신 친정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평상시에 따뜻하게 곁에 자주 있어드리지 못하면서도
가끔은 꿈속에서 부모님 돌아가셔서 울먹이다 깨서는
부모님 돌아가시면 나도 따라 죽는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었는데,
내 기분 좋은 것 만큼 그 분들 기분도 좋아지시게
어차피 공돈,, 광이나 내면서 부모님께 써야겠다.
아버지 이번달 제 월급이 어쨌구요, 엄마 예상 못한 제 공돈이 저쨌구요..
말씀만 듣고도 흐믓해 하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백화점 쇼핑을 갔어요.
한참을, 시간을 들여서 공을 들여서 화장을 하시는 어머니.
아무것도 안사더라도 딸년 손 잡고 활보하시는 것이 좋으시다는 어머니.
몇번을 일어났다 앉았다 하시면서 시간 맞추어 자동차 시동걸며 흥겨워 하시는 아버지.
고작해야 백화점 휴게실에서 신문보시면서 몇시간이고 우리 쇼핑 끝나길 기다리실 아버지.
우리 아버지도, 우리 어머니도,
할머니처럼 요즘의 하루 하루가 길게만 느껴지시겠지요?
그리고는 훌쩍 세월을 놓쳐버리시구요.
출근 준비하는 거울 너머로 어느새 자리잡은 내눈가 주름 볼 때의 시린 느낌보다
머리 손질하다 슬쩍 들춘 내 귀밑머리 속에 한무리의 흰머리 볼때의 철렁한 느낌보다
꼭 잡은 어머니의 주름진 야윈손이 맘이 아팠어요.
나를 보고 웃으시는 아버지의 노인같은 빛바랜 표정이 맘이 아팠어요.
가을..
이제 인생의 늦가을로 가시는 두분이시지요.
잘 해드려야 할텐데..
너무도 부족한 딸년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