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

슬픔 .. 너였구나

때로는 2006. 10. 7. 18:04
        
      슬픔, 너였구나  /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으로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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